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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3세를 뽑은 콘클라베의 숨겨진 이야기 – 1958년, 변화의 서막
요한 23세를 뽑은 콘클라베의 숨겨진 이야기 – 1958년, 변화의 서막

 

1. 비오 12세 선종 이후의 상황

1958년 10월 9일, 비오 12세가 선종하면서 가톨릭 세계는 다시 한번 콘클라베를 준비해야 했다. 그의 재위는 20년 가까이 이어졌고, 냉전 초기 세계 질서 속에서도 가톨릭 교회의 중립성과 전통을 유지하려 했다.

비오 12세의 엄격하고 고결한 스타일은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경직성과 보수성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새로운 교황은 시대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기대와 긴장이 동시에 감돌았다.

 

 

2. 콘클라베 준비와 분위기

1958년 10월 25일, 51명의 추기경들이 시스티나 성당에 모였다. 당시 추기경단은 절대 다수가 유럽 출신이었고, 특히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들의 영향력이 컸다.

콘클라베의 분위기는 무겁고 조심스러웠다. 세계는 냉전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가톨릭 교회 역시 내부 쇄신과 외부 정치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민해야 했다.

 

 

3. 주요 후보군과 파벌

당시 주요 후보는 교황청 국무성 장관 출신의 도메니코 타르디니 추기경, 보수 성향의 베네데토 알로이시 마시야 추기경 등이 있었다. 그러나 전통주의자들과 점진적 개혁파 사이의 이견이 뚜렷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도기적 인물’로 주목받은 인물이 바로 베네치아 총대주교였던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추기경(후일 요한 23세)이다.

그는 온화하고 포용적인 성품으로, 갈등하는 파벌 모두에게 적대감을 주지 않는 인물이었다.

 

 

4. 투표 진행 과정

콘클라베는 4일 동안 진행되었고, 총 11차례의 투표가 실시되었다. 초반에는 확실한 우위 후보가 없어 표가 분산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론칼리 추기경에 대한 지지가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적 색채가 옅고, 나이가 많아 ‘과도기적 교황’으로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1958년 10월 28일, 론칼리 추기경이 3분의 2 이상 득표를 얻어 선출되었다. 그는 ‘요한 23세’라는 교황명을 선택하며 교회 쇄신의 서막을 예고했다.

 

 

5. 요한 23세 선출의 의미

요한 23세의 선출은 많은 이들에게 예상 밖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단지 과도기적 교황으로 여겼지만, 그는 전례 없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교회의 대대적 변화를 이끌게 된다.

온화한 리더십과 개방적 사고방식은 전 세계 신자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희망을 안겼다.

 

 

6. 요한 23세 콘클라베가 남긴 것

1958년 콘클라베는 가톨릭이 중세적 경직성에서 벗어나 현대 사회와 대화하기 시작하는 전환점이었다.

요한 23세의 선출은 단순한 과도기가 아니라, 교회 내외부에 엄청난 지각 변동을 가져오는 시작점이 되었다.

 

7. 결론 – 변화의 시작을 알리다

요한 23세를 뽑은 1958년 콘클라베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거 중 하나로 기록된다. 그는 가톨릭의 문을 세상에 활짝 열었고, 이후 교황직의 역할과 가톨릭 교회의 정체성에 지대한 변화를 남겼다.